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홍주성(천년여행길)
홍화문(남문)
홍주읍성은 사적 제23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성곽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10m의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있다. 조선 초기 지방 읍성을 새로은 규정에 맞추어 쌓게 되었을 때, 홍주읍성도 새로 쌓아 1451년
문종 1에 완성하였다. 이때의 기록에 '홍주읍성은 문이 4개소에 그중 1개 웅성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
홍주읍성은 여러 차례 보수 확장하였고 1870년 고종 7 홍주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홍주읍성을 , 보수하여 새로
정비하였고, 같은 해 홍선 대군이 직접 써서 내려준 현판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 문
북분은 양화 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남문 이름은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는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07~2009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고 웅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2013년 복원되어 홍화문이라 이름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城邑城)
지정 별:사적 제231호
지정 연월일:1972년 10월 14일
최초 축성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
했던 해풍현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규모는 1,2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 확장을 하였고 조선시대 고종 7년(1870) 홍주 목사
한웅필이 연금봉 3 천냥과 원납 금, 지세 부과금으로 석성을 개축하여
1,830척에 560척을 중보 하여 석축 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曲城),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虹霓門)으로
하였다
같은 해 대원군이 휘호 한 (문액(文額)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 문(景義門), 북문은 망화 문(望華門)이라 하였다. 그 후 홍성
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철하고 성곽 곳곳을 철거하면서 동문
마저 훼철하려던 것을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였다.
홍주읍성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810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
남아 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 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 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홍성군에서 홍주의 역사 외문 화유산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이하여
홍주읍성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게시글-
_ 홍성군 -
홍주성 비석 군
홍주성 비석 군은 본래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 밖과
금마총주변에 잇었습니다. 이후 주변이 개발되면서 각각
홍주성 안의 의병공원 부지로 옮겨졌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항 비석은 1824년 성벽과 건물을 수리한 것이 기록된
홍주성 수성 기적비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조선 중. 후기에
홍주목사를 지낸 5명의 홍주목사 선정비가 있습니다.
그중 유의(1734~?)는 정약용이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대 홍주목사 롤 재직한 인물로서, 그의 검소함과 청렴결백함
에 감탄해 정약용이 청백리의 표상으로 목민심서에 기록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윤동원(1685~1741). 경섬(1562~1620), 변시익(1598~1653),
순조 때 목사를 지낸 김희신(?~?)등이 선정비의 주인공입니다
- 천년여행길 계시 글
사찰 부재
조선 초기 억불숭유 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사찰 소유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되었습니다.
또한 사찰 건물과 탑을 부수고 거가에서 나오는 부재들을
관아 건물과 유교시설을 짓는 데 사용했습니다.
홍주성 주변의 사찰 부재들도 홍주성벽 곳곳에 사용된
탑의 몸돌과 여러 가지 사찰 관련 부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주성 수성비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166호
이 비는 1824년(순조 24) 황폐된 홍주읍성 보수 완공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본래 홍주읍성 조양문 앞에 있었다.
비문에는 성의 축조 과정을 적고 있다.
홍주 지역은 바닷가에 있어서 서울의 서남족의 방비를 위한 중요한 지역이다.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1823년(순조 23)
봄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하기로 하고,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완성된 성의 규모 눈 7리이고 일을 한 날이 100여 일이었다.
비의 뒷면에는 성 쌓기 작업을 주고 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홍화문
홍화문은 홍주성의 남문입니다. 본래 홍주성은 4개의 문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3문으로 바뀌었습니다.
1870년 고지에는 남문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는 남문 주변에 송림을 만들어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발굴을 통해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홍성군은 2013년 12월 남문을 복원한 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문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병오 항의병 기념비
홍성 홍주아문
홍주 위 지방관(목사):조선 시대에 지방 행정 단위인 목을 디스 리던 정삼품 외직
문관)이 근무하는 건물인 안 희다의 바깥문이다. 고종 7년에 한웅필 목사가 홍주읍성을
크게 수리할 때 같이 세운 것이다. 홍주아문이란 현판은 홍선 대원군이 직접 써 주었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정면 5칸인 것이 특징이며, 가운데 출입문은 사방 경계를 위해 긴 받침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다. 조선 시대에 건립된 관청 출입문 중에 가징 크고 독특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관청 출입문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양문
사적 제431호
이 문은 홍주읍성의 동문으로 조선 1870년 고종 7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다. 홍주읍성의 문은 동문운 조양 문, 서문은
경의 문, 북문은 망화 문이라 하는데 홍선 대원군이 친필로 현판을
하사하였다. 북문은 역대 목사나 영장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는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 1906년 광무 10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이다.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하였으나 읍민들이
강경한 반대로 보존 도었고 1975년 문루 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홍성 홍주읍성 감옥
감옥은 범죄 혐의가 잇는 사람을 가두는 시설로 조선시대에는 담장을 둥그렇게 둘러
원옥이라도 하였다 서울에는 형조와 한 성분, 사헌부와 병조 및 승정원 등에
설치되었으며, 지방에는 행정 관청이 설치되었다.
고종 9년 1872에 제작된 홍주 지도를 보면, 홍주읍성 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감옥을 주관하던 홍주 재판소는 1895년에 설치되었는데, 1913년
홍주 재판소오 검사국이 옮겨가는 감옥도 철거되었다.
현재의 감옥은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 조성 사업이 추진되던 2012년 당시 형재의 위치에
복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