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의 풍경사진방

경남 창녕군 / 하왕산국립공원/ 관룡사

봄내음다올 2015. 11. 27. 15:39

 

 하왕산국립공원내(관룡사)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 준다는 관룡사>

창녕현 동쪽에 높고 크며 숲이 빼어난 하왕산이 있다 이름은 하왕이라 한 지가 오래 돠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다
산 동쪽 아름다운 곳에 관룡사 라는 사찰이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화왕산 꼭대기에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이 있는데 절을 창건 할때 용이 그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신비롭게 여겨 절의 이름 을 관룡사 라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을 겪으며 관룡사 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사라지고 오직 약사전만이 그화를 면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영운"이라는 고승은 약사전에 영험한 기운이 있어 화를 피했다고 여겨 약사전을 자세히 살펴 보았는데 끝의 나무가 겹쳐진 곳에서(영화5년가유.349) 라는 글자를 발견 하였다 이때부터 관룡사에서 빌면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워진다는 설이 널이 펴졌고 관룡사는 많는 이들이 수행하고 기도 하는 영험한 수행자가 되었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관룡사의 역사는 1700여년의 되니 이땅의 불교역사가 함께 한다고 볼수있다 관룡사의 대표적인 유물로 신라시대를  대표 한다고 할 수 있는 봉선대 소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의 보고있다 

 

 

 

<창녕 관룡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3칸의 다포식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우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춤이 큰 창방과 평형을 놓고 그 위에 세부를 옛 방식으로 처리한 포작을 올려 놓았다 포작은 안팎 모두 그출목이며 출목 바로 위 살비첨차의 끝은 삼각형이다.
쇠서 짧아서 건실한 멋을 느끼게 한다
우물 천장으로 되어 있고 금단청을 하였다 1965년 헤체 복원때 1749년(영조25)다시 지을 당시 써 놓은상량문이 발견됨으로서 1401년(태종원년)에 처음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1618년(광해군 9-10)에 다시 지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약사전 앞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계승하였다
특히 하대석 의 네면에 코끼리의 두눈을 형상화 한안상을 각각 두개씩 조각하였는데 이는 석탑의 장식적 가능을 강조한 통일 신라시대 말기의 석탑 표현 양식이다
사각형 의 지대석은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조성하였는데 자연 암반 등을 그대로 석합의 밑바닥에 이용 하는것 통일 신라시대 말기의 양식 을 반영한 것이다 탑신 부분은 지대석보다 심하게 파손 되었는데 1층 탑신부와 그 위층 탑신부의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나서 조화미가 떨어진다 통일신리시대 석탑에서 주로 표현 하던 5단의 옥기 받침은3단으로 줄어 들었고 옥개석 역시 두툼 하며 처마 끝의 추켜 올림이 약하게 표현 되었다 이는 신라형 석탑의 변형 과정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수있다 크기가 작아지고 각 부분의 기법이 간략해진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창녕 관룡사 석조 여래좌상>

고려시대에 만들어 약사전에 모셔진 불상이다 머리 위의 둥근 육계에는 가르침 상징하는 반달 구슬인 계주를 표현해 형식화 되어 가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대좌는 세 부분 으로 고성 되어 있는데 연꽃 잎을 거북 등처럼 새긴 상대석 팔각형의 중대석 연꽃 잎을 두겹 깐 사각형의 하대석으로 되어 있다
불상이 크기에 비해 대화를 높게 만들렀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이 지역의 식공이 8세기의 신라불상을 본보기로 만들었기 때문이므로 보인다
팔각형의 중대석에는 조상기가 4행 새겨져 있는데 이를 보면 중대석이 772년(혜공왕8)에 조성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로써 현재 남아있는 중대석과 불상의 조성시기는 다른것 으로 확인되었다

 

 

 <창녕 관룡사 약사전>

정면 과 측면이 각 1칸의 맞배지붕이다
공포 는 기둥 위에만 있으며 그 사이의 포벽에는 구조물이 생략되어 있다
창방의 끝을 그대로 첨차로 만들었는데 이 는 주심 포계 건물에서 볼수 있는 독특한 수법이다 내무의 점차는 다포계 건물에서 처럼 원로곡선을 이루었다
이 처럼 두가지 계통의 첨자를 사용한 에는 1404년(태종4)경에 세운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1473년 (성종4)다시 지은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이 있어 이 건물도 최소한 15세기에 건립 되었을 것으로 본다
지붕이 기둥 간격에 비하여 두배 가까이 길이 연면적은 좁으나 전체적인 모습은 균형 잡힌 안정감을 준다

 

 

 

<관룡사 원음각>

1634년(인조12)에 건립된 사원의누각이다

건물의 상량문에는 따르면 1763년 (영조39)에 크게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1704년 (숙종30)대홍수 때 산사태로 훼손된 것을 고쳐 세운 것으로 집작된다 정면3칸 측면2칸규모에들보 5량으로 조성된 이익공계 건물이다

우물 마루로 되어 잇는 바닥은 대웅전 앞마당 과 높이가 같아 마당에서 출입 하기가 매우쉽다

불구를 보관 하거나 설법을 하는 장소로 쓰였다 예전에는 누각 아래 중앙칸을 거쳐 대웅전 마당으로 출입 하였으나 지금은 아래기둥 사이를 벽으로 막아 스님들이 공부방으로 쓴다

 

 

<관룡사 사적기>
관룡사의 창건 중수 과정 등 관로사의 내력 을 전해주는 기록으로 사적기 1책과 목판11매로 구성되어 있다 사적기 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733년 (영조9)에 신유한1681~?) 이 작성한 보문과 산인 명학이 이듬해에 쓴 발문 사찰 내 각 전각과 부속 암자에 보관된 경전과 기물의 목록등이 나열 부록이 그것이다 사적기에는 신라시대에 관룡사를 건립하게 된 유래와 연력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절의 중수와 그 공사를 맡은 주지의 이름 공사에 들어간 비용 등까지 적혀 있어 관룡사의 역사를 이해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적기의 저자로 후손에게 관룡사의 역사를 전해 주려고 이 사적기를 작성하였다고 하였다

 

 

 

 

 

 

 

 

 

 

 

 

<관룡사 전경>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 여래좌상>

관룡단(137,7미터) 정상 부근의 스십 길 낭떠리지 위에 홀로 앉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2.98미터이고 불신 높이는 1.81미터 이며 대좌 높이는 1.17미터이다 높은 대좌 위에 향마 촉지인을 하고 앉있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머리에는 둥근 육계와 나발 이 올려 졌고 얼굴은 사각형 이지만 둥근 맛이 있다
조금 뜬 가다란눈 짧고 넓적한 코에 입가에 미소를 띤 온화한 인상이다
머리에 비해 어깨가 좁아 조금 위축된 듯 보이지만 안정감이 있다 다리를 틀고 앉은 하체는 묵직해 보여 안정감이 있고 불상의 뒤까지 표현된 옷 즈름 은 규칙적 이면서 평평하다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으로 높게 구성된 대좌는 아름답게 만든어져 있다
이러한 특징은 8세기의 불상에도 나타나지만 위축된 자세와 사실성이 줄어든 조각 수법등으로 볼때 8세기에 전통 계승하면서도 9세기 이루 형식화 되여 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관룡사 석장승>

장승은 일반적으로 돌로 만든 석 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 장승으로 나뉜다 고려성기 승배에서 나왔다는 설과 사찰토지의 표지로 이용했다는 설 등 기원설이 다양하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에 따라 벅수 벅시 법수 수살목 당산 할배 등으로 불렀다 장승의 소속과위치에 따라 마을을 지키는 마을 장승 사찰의 입구나 사방 경계에 세워진 사찰장승 지역간의 경제 성문 병영 해창 관로 등에서 있는 공공장승 등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관룡사 장승은 절 입구에 한 쌍이 서 있다 왼쪽에 서 있는 것이 여장승이다 상투같은 둥근 머리와 툭튀어 나온 왕방울눈 주먹코 등. 투막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만 남 장승의 턱이 각진데 비해 여 장승은 부드러운 선을 유지하고 있다
두 장승은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위상에 걸맞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 니를 드러내 위용은 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민간 예술의 특징인 소박함과 친밀함도 잘 드러나 있다 괸룡사 소유 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지 이지만 그외에도 사찰토지 안에서의 사냥과 여로를 금지하는 호법 절에 잡귀가 출입하는 것을 막아 주는 수호신 풍수 지리적으로 처한 곳을 보충해 주는 비보 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본다. 그런점에서 이 석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한 사례를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주소: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