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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김천시 /직지사

봄내음다올 2021. 11. 30. 15:19

직지사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 신라땅에 불법을 전하고자 일선주에 와서 숨어 살다가 신라왕녀(성국공주)의
병을 고쳐 준 인연으로 불교가 허용되어 도리사 와 함께
서기418년 황악산 아래 절을 지어 "직지사 "라 하니
김천은 선산과 더불어 신라불교의 발상지가 되었다.
절의 이름은 직지인심견성성불 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땄다고도 하며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르키며 명당터를 일러주었다하여
곧을 직에 손가락지자를 따서 "직지사"라 했다고 전한다.

 

 

 

창건 이래 신라시대에 두 번의 큰 중건이 있었는데 두 번째 중건때인 930년 천묵대사가 금자대장경을
서사하고 경순왕이 경명제자를 썼는데 이는 고려 대장경보다 590년 앞에서 금글씨로
대장경을 펴냈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주지 능여조사가 서기 927년 대구 공산전투기에서
피해 위기에 처한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게 한 공으로 논천결을 하사받는 등 고려 왕실의 지원으로 크게 융성했다.


조선시대에는 승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극도로 탄압 받았으나 2대 임금 정종의 어태가 직지사 대웅전 뒤 북붕에 안치되자
선종대가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금산현이 금산군으로 승격되고 조선왕조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또한, 직지사는 사명대사의 출가사찰로 유명한 1559년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어 직지사로 출가한 사명대사는

임지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이끌고 왜병을 물리치고 전후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데 큰 공을 세워 조선 조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직지사는 임진해란 때 왜병의 방화로 전각료 43동중 3동(천왕문,일주문,비로전)만 남기고 전소되었다가
중건에 착수하여 70여년만인 1662년 (현종3년)에 복구되었는데 이것이 세번째 중창이다.


일제가 국권을 병탄하고 이듬해(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고 전국의 사찰을 탄압한 이후 사세가 열악해져

당우와 암자 또한 많이 훼손되었으나
1954년 다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본사로 승격되어 대가람의 면모를 회복했다.- 직지사여행글들

 

 

꽃무룻
식재연도 :2019년 5월
수량 :21만본
개화시기 : 9월 ~ 10월 초

꽃무룻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때는 잎이 없어
꽃은 잎을, 잎은 그리워하여 상사화라고도 불린다


꽃말 _ 이룰 수 없는 사랑. 참사랑 -   게시글

 

 

 

대웅전과 삼층석탑
보물 제1576호인 직지사 대웅전은 2층 5간의 웅장한 규모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35년 (영조11년)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불과

약사여래불을 정면5칸. 측면3칸의 팔각지붕으로 중건되었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1974년 문경도천사지로부터 이전한 것으로 보물 제660호로 지정되었다.

 

 

 

비로전과 동자상
고려 태조 능여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태조17년
경잠대신대사에 의해 천불상이 봉안됨으로써 천불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소실을 면한 유일한 불전으로 정면7칸.측면3칸의 맞배지붕 구조이다.
14개의 나무계단에 경주옥돌로 조성된 천개의 불상 중 동자상을 첫눈에 발견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