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울릉도 지명의 유래등 )
울릉도는 무릉, 우릉, 우산,으로 불렸던 섬이다.
1000년대 초 일본인들은 우루마로 불렀으며1700년대 프랑스인들은 다쥐레(Dagulet)로 기록했다.
이두로 보아야 할 이 한자 표기들의 주류인 울릉과 우릉은 'ㄹ'이 하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우산은 우뫼로 읽힌다. 여기에 일본인들의 우루마 곧 울마를 고려하면 울릉과 우릉의 받침 소리는 'ㅇ' 이 아니라 'ㅁ'이었지 않나 싶다.
우뫼, 울마, 울름, 우름에 가장 가까운 소리는 우르뫼의 줄임말 울뫼다. 울릉도의 본래 이름은 이렇듯 산에서 온 것이다.(울뫼의 울은 나리분지를 울타리처럼 두른 산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울릉도의 높은산이라고는 성인봉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산 없는 봉이다. 본래 산이었던 것이 봉으로만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개관에서 언급한 가설은 여기서 정설로 입증된다.
울릉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랜 유물은 김해식 토기 전통이 약간 남아 있는 조잡한 갈색 승문토기다. 석기나 고인돌은 물론 없다. 이로 볼 때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들어간 것은 김해식 토기 시대 후기인 1세기쯤으로 추정된다. 울릉도로 추측되는 것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다.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고구려에 쳐들어온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현도군의 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남옥저(지금의 함남 남부 지역)까지 쫓게 하였다. 거기까지 온 왕기가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그 지방 사람이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칠월이면 소녀를 골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있다고 들었다" 하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일본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는 그섬은 틀림없이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기록은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우산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부터 보인다. 바로 거기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하슬라(강릉) 주둔군 사령관 이사부가 뱃머리에 나무 사자를 세워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고학자 김원룡 박사는 그 우산국 사람들이 낙동강 동쪽,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도 바닷가 지방 출신들이라고 본다. 그랬기에 점령 당시 이사부의 나무 사자 거짓말이 통했다는 것이다(이사부가 거짓말을 할때 통역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록의 문맥으로는 직접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400년 넘게 자취를 감춘 울릉도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고려 통일 전야인 태조 13년(930)이다(그동안 울릉도는 정말 태평성대를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백길, 토두라는 우릉도 사람 둘이 공물을 가지고 왕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90년쯤 뒤인 현종 9년(1018)에는 고려 조정에서 동북 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초토화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내 주고 13년에는 해적을 패해온 섬사람들을 지금의 경상도 영해 지방에 살 수 있도록 조처하고 있다.
현종 때는 여진 해적의 극성기였다. 1019년에는 그들이 50척이나 되는 배를 이끌고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내려와 463명을 죽이고 1,230명을 잡아갔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해적들이 포로가 되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개 고려인으로서 여진 해적과 싸우다 잡혀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한다(일본 역사책에만 보이는 기록이다).
숙종 2년(1097) 안변도호부의 판관 안증은 원산 앞바다에서 열 척의 해적선과 맞붙어 40명을 죽이고 세 척을 나포했다. 숙종 12년(1107)과 그 이듬해에는 윤관이 동북 여진을 쫓고 거기에 9성을 쌓았다. 근거지를 뺏긴 여진족들은 1115년 하얼빈 부근의 회령 지방으로 옮겨 중원으로 쳐들어간다.
1125년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더니 이태 뒤에는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노른자 황하 유역을 차지한다. 동양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윤관의 일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 사람들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전인 덕종 원년(1032)을 끝으로 끊기고 만다. 해적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현종 13년의 경우처럼 모두 육지로 나와 버렸던 것 같다. 이후 인종 19년(1141)과 의종 11년(1157)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사람이 살 수 있는가 보지만 조사로 그쳤을 뿐이었다.
울릉도에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최중헌이 왕에게 시무 10조를 건의한 1200년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왜구라는 해적들이 몰려왔다. 그리하여 고종 10년(1223)부터 시작되어 조선 세종 원년(1419)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할 때까지 196년 동안 500여 회나 쳐들어왔던 그들 때문에 울릉도는 다시 무인지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들어가 사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산것, 갯것이 지천인데다 자유의 땅인 터라 버젓이 살 처지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사람들을 잡아 육지로 끌고 들어오곤 했다. 사람이 있으면 왜구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 태종 3년(1403)과 13, 14년, 세종 7년(1425)과 20,23년 무렵이었다. 이후 울릉도는 정말 빈 섬이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저들 마음대로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고기를 잡아갔다. 심지어는 제나라 땅이라며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그래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과 22년에 일본 막부로부터 독도는 조선땅임을 확인받아 이것이 양국 정부간의 공식 협약이 되게 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조정에서는 마침내 공도정책(섬에 사는 것을 불법으로 치는 것)을 버리고 개척령을 발표하여 울릉도의 역사를 이었다.
-울릉도의 역사-
울릉도는 무릉,우릉,또는 우산국으로 불렸다.
청동기시대(B.C. 1,000. ~ B.C. 300),또는 철기시대 전기(B.C. 300 ~ A.D. 1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 등이 발견되고 있어 그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의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에 관한 기록에서 언급된 동해안의 섬이
울릉도라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울릉도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512년 신라 지증마립간 13년이고, 하(아)슬라(지금의 강릉)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옮겨온글)
B코스= 내수전 전망대- 봉래폭포 - 촛대바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
▦...봉래폭포...▦
봉래폭포는 낙차가30여m 이르는 3단 폭포로서 울릉도의 도동과 저동을 비롯한 납부 일대의 중요한 상수원이다.
이곳의 물은 북쪽의 나리분지에 모인 강수가 지하로 스며 들어 지하로 스며 들어 지하에서 피압수가 되어 지표로 용출하는 것이다.
지표로 솟은 다량의물이 지형의 기복을 따라 흘러 내림으로 폭포가 형성되었다.
1일 유량은 약3.000톤 이상이 되며 주변에는 풍혈 투막집 삼립욕장 등이있다.
독도는 신생대 3기인 460만년 전에 화산폭발로 생긴 34개의 바위섬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독도와 인접한 울릉도에서 찾아낸 유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인 [갈색무늬 토기](승문토기)가 사용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기원 후 약300년 무렵(서양: 로마시대, 우리 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으로 추측되며, 울릉도는 신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으므로 주민들도 신라 동해안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짐작되고 있다.
이러한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로 이루어진 우산국이 신라 영토에 귀속됨으로써 역사서에 그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B코스= 내수전 전망대- 봉래폭포 - 촛대바위
내수전전망대-죽도,관음도,섬목이 한눈에 보인다. 넓게 뻗은 수평선과 청정한 바다를 보며 가슴이 확 트이는 새로운 기분을 느낄수 있다.
내수전 일출전망대로 가는 길은 수많은 동백나무와 마가목등이 터널을 이룬 가운데 두사람이 나란히 걸을수 있는 정도의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입구에서부터 전망대까지는 편도 약15분 정도 소요되며 목재 계단을 통해 해발 440여m의 전망대에 올라서면 넓게 뻗은 수평선과 청정한 바다위의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관음도(깎새섬), 섬목, 죽도, 북저바위, 저동항과 마을, 행남등대등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특히 오징어가 본격적으로 잡히는 추석 이후부터 11월 정도까지의 어화(漁火) 또한 혼자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울릉도의 밤풍경이며 물론 야간에도 찾는이들의 편의를 위해 해질녁부터 자정무렵까지는 일출전망대를 오르내리는 길에는 조명시설이 되어 있는 관계로 찾는 이들의 불편함을 일부 해소해 주고 있다. 그리고 산으로는 울릉읍 도동능선에서 부터 옛날 나리분지와 저동을 지게짐을 지고 넘어 다니던 산능선인 장재고개, 소불알산을 조망 할 수 있다. 내수전 일출전망대 입구에서 북면 석포전망대까지는 편도 2시간 정도의 멋진 트래킹 코스가 이어져 있다.
죽도
A코스 도동항 출발 -사동-뽕구미-남양-구양-태하-현포-천부-나리분지-도동
자연산 미역 말리는 모습
부지갱이나물 자연바람으로 말리는모습
울릉도 독도 지질공원 노인봉
노인봉은 마그마의 통로인 화도가 굳어서 형성된 바위이며 높이는 약200m에 달한다 암석포면의 절리들이 노인의 주름살 처럼 보인다고 하여 노인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노인봉을 구성하는 암석은 포놀라이트인데 용암의 점성이 높아 주변에 비해 경사가 가파르고 뾰족한 암체를 형성하였다.
수평에 가까운 수많은 주상 절리들이 잘 발달한다.
코끼리바위
나리분지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
해안도로 도보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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